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붕괴 == [youtube(3jLhbrqL75Y)] [[1994년]]~[[1995년]] 부분을 보면 된다. [[1994년]]부터 [[북대서양 조약 기구|NATO]]가 [[보스니아 내전]]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웃한 크라이나의 사태도 전환점을 맞게 된다. 3년간 [[미국]] [[민간군사기업]]의 자문과 지원을 받은 [[크로아티아군]][* 민간군사기업의 자문과 지원이라고는 하나, [[미국 국무부]]가 알선해준 전직 [[미군]] 고위장성 중심의 민간군사업체라는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[[미국]]과 [[NATO]]가 크로아티아군을 교육하고 훈련시켜준 것과 마찬가지였다.]은 3년 전에 비해 전력 면에서 많은 향상을 하게 되었고 [[1995년]] [[5월 1일]]부터 시행한 섬광 작전(Operacija Bljesak)으로 SVK는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. 이미 크라이나 측은 미국이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는 시점부터 버티는 것이 버거워졌다고 생각하고, [[1995년]] [[5월 23일]] [[스릅스카 공화국]]과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052100329107002&editNo=20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5-21&officeId=00032&pageNo=7&printNo=15431&publishType=00010|국가 통합에 나섰으나]] 이미 지나간 버스였다. 마침내 석달 뒤인 [[8월 4일]]부터 나흘간 벌어진 일명 폭풍 작전(Operacija Oluja)는 크라이나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이로써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이게 된다. 놀랍게도 [[8월 5일]] 전선 붕괴 시작 '''1주일만에'''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이 멸망하는 것을 알 수 있다. 무려 4년 동안이나 유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전선이 단 1주일만에 붕괴한 것이다. [[8월 4일]] 오전 9시 폭풍 작전[* [[UN]]이 오전 8시 이전에 전쟁을 시작하지 말라고 통보해서 크로아티아에서 9시부터 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했다.] 시작 31시간만인 [[8월 5일]] 오후 4시에 크라이나 수도 [[크닌]]이 함락됐고, 전투 48시간만에 크라이나 대부분의 지방이 크로아티아군 손에 떨어졌으며 [[8월 8일]] 크로아티아는 크라이나의 최종 멸망을 선언하였다.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대통령 [[밀란 마르티치]]는 [[스릅스카 공화국]]의 [[바냐루카]]로 도망갔으며 RSK의 [[밀란 바비치]] 수상은 [[9월 11일]] [[베오그라드]]에 정착하였다. 크라이나의 외무차관[* 외무장관은 [[밀란 바비치]]가 겸직했다.]은 [[크닌]]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[[크로아티아]]에 잡혀서 현장에서 [[총살형]]으로 [[처형]]되었다, 대충 전사로 처리한 모양. 살아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지도부 인사들은 영내 비세르비아인에 대한 [[인종청소]] 혐의로 [[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]]에 피의자로 넘겨져 처벌을 받았다. 밀란 바비치는 [[전범재판]]을 받아 13년 [[징역형]]을 살고 항소심 재판을 하던 도중 독약을 마시고 [[자살]]했다. 밀란 마르티치는 재판에서 징역 35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[[에스토니아]]의 [[감옥]]에 수감돼 있다. 이때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는 '''유고 연방군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했던 연방군의 크라이나 파병안을 끝내 거부하여'''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080600329107003&editNo=40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8-06&officeId=00032&pageNo=7&printNo=15503&publishType=00010|크라이나의 멸망을 방치했다]]. 밀로셰비치가 크라이나를 방치한 이유는 여력이 없어서는 아니었고[* [[밀로셰비치]]는 [[보스니아 전쟁]]에 대해 철저하게 방관자의 역할만 했다.] [[1993년]] 아테네 합의가 [[스릅스카 공화국]]에 의해 파기되자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zCF0jLDQmpY|밀로셰비치가 격렬하게 반발]]해 스릅스카로 들어가는 군사 지원을 90% 이상 감축했기 때문이다. 밀로셰비치는 이전부터 주적은 [[크로아티아]]의 [[프라뇨 투지만]] 대통령이라고 주장했고, 보스니아 전쟁을 하루빨리 마무리 지을 것을 요구했다. 그러나 [[라도반 카라지치]]는 크라이나의 [[밀란 마르티치]] 대통령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면서 크로아티아 전선을 내팽개치고 [[보스니아]]의 [[비하치]] 함락에만 골몰했다. 그러다 보니 카라지치와 밀로셰비치는 갈등이 점점 심해졌고[* 이후 [[1995년]] [[데이턴 협정]]에 원래라면 [[라도반 카라지치]]가 참여해야 하지만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가 참가한 것은 다 이런 내부 정치 갈등이라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.] [[1995년]] 들어서면 밀로셰비치는 이 일대 지역에 대해 아예 손절에 가까운 입장까지 가게 된다. [[보스니아 내전]]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안겨주었으며 크로아티아군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크라이나에 거주 중이던 20만 명 가량의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영내의 [[스릅스카 공화국]]과 세르비아 본토로 축출되면서[*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크라이나 지역이 크로아티아에게 함락당한 이후에 세르비아로 피난와서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 국민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았냐면 더더욱 아니었다. 외려 [[외국인]], [[불법체류자]] 취급을 하며 엄청난 홀대와 차별을 가했으며 이 때문인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인들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인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. 우습게도 이는 그리스나 프랑스나 일본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에 흔했던 일이었다.] 크라이나 사태는 사실상 종식된다. 이후 이 지역은 [[UN]] 측에서 일정 기간 관리하다가 [[1998년]] 크로아티아가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된다.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[[인종 청소]]가 자행됨으로서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나서, 당시 작전을 주도한 크로아티아군 인사 몇몇이 [[전범재판]]에 넘겨지기도 했으며[* 대표적으로 전범 재판 재판정에서 판결에 불복하며 즉시 독약을 먹고 자살한 [[슬로보단 프랄략]]이 있다. 슬로보단 프랄략의 결정적인 혐의는 보스니아에서 [[보슈냐크인]]들과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[[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]]의 성립에 관여했다는 게 컸지만.], 크로아티아 국내에서는 큰 반발을 부르기도 하였다. 이 작전의 결과 오랜 기간동안 세르비아인들의 거주지역이었던 크라이나는 [[크로아티아인]]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되었다.[* 물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나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간 일부 크로아티아 출신 세르비아인 주민들이 돌아오기도 했다. 현재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숫자 역시 4.35%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.] 광신적인 세르비아 [[민족주의]]가 추구했던 대세르비아라는 야욕은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의 축소를 불러온 것이다. 비록 [[크로아티아군]]의 인종청소 역시 비열한 행위였지만, 타협없이 잔인한 전쟁을 계속하던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도층 역시 한때 동구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자 풍족하고 평화롭던 [[유고슬라비아]]를 인간도살장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